11월의 시 모음 - 이해인 나태주 박형준
가을의 마지막 문턱에서 만나는 11월은 조용히 계절의 결말을 품고 있습니다. 단풍이 다 지고, 바람이 조금 차가워지며, 나무들은 잎을 털어내고 긴 겨울을 준비합니다. 이 시기는 쓸쓸함 속에서도 유난히 깊은 사색과 평화를 안겨주지요.


이번 글에서는 ‘11월’을 주제로 한 시인들의 11월에 관한시 작품을 모아 그 감성과 사유의 결을 함께 느껴보려 합니다. 이해인, 나태주, 박형준, 김은숙, 박세현, 이면우, 동시영 시인의 11월의 시 모음을 통해 늦가을의 정서를 가득 채워봅니다.
11월의 마지막 기도 - 이해인
11월의 마지막 기도 / 이해인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사는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이해인의 ‘11월의 마지막 기도’는 인생의 끝자락, 혹은 한 해의 마지막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은 작품입니다. 시인은 비움 속에서 충만함을 느끼며, 남은 욕심을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다짐합니다.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의 흰 구름이 되고 싶은 마음’은 초월과 해탈의 경지를 상징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빛과 사랑’을 믿는 믿음은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도 인간적 위로로 다가옵니다.
감상평
이 시는 죽음과 떠남을 두려움이 아닌 평화로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가벼운 충만함’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며, 인간이 마지막까지 품을 수 있는 순수한 희망을 드러냅니다.
시인 프로필
- 이름: 이해인
- 출생: 1945년 경남 진해
- 직업: 수녀, 시인
- 대표작: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삽’, ‘사랑의 얼굴’
- 특징: 신앙과 시의 언어를 결합하여 삶의 고요함과 위로를 노래하는 시인


11월에 - 이해인
11월에 /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 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게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
이 시는 ‘11월’이라는 계절을 통해 인생의 성숙과 고독을 그립니다. ‘영혼의 책갈피에 끼운 잎새’라는 표현은 지난 세월의 추억을 상징하며, 그것을 통해 슬픔조차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각이 드러납니다.

감상평
11월은 모든 것이 사그라드는 계절이지만, 시인은 그 속에서 자기 성찰과 평온을 발견합니다.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한다’는 구절은 슬픔마저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깊은 통찰을 보여줍니다.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 작품은 이해인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감사와 비움의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청빈한 나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깨끗한 존재의 상징으로, 시인은 11월의 자연을 통해 인간의 마음가짐을 비유합니다.
감상평
이해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랑’, ‘비움’, ‘감사’의 주제는 이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11월의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잘 떠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 같은 존재로 표현됩니다.

11월 - 나태주
11월 /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나태주의 시는 늘 짧지만 깊습니다. ‘11월’에서는 늦가을의 시간 속에서 지나간 청춘과 사랑의 아쉬움을 노래합니다. ‘버리기엔 아까운 시간’이라는 구절은 인생의 덧없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선택하는 인간의 따스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감상평
시간의 유한함을 인식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태도가 아름답습니다. 11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남은 온기를 지키려는 ‘사랑의 결의’가 이 시의 핵심입니다.
시인 프로필
- 이름: 나태주
- 출생: 1945년 충남 서천
- 대표작: ‘풀꽃’, ‘너무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시 세계: 소박한 언어로 일상의 사랑과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

11월 - 박형준
11월 /박형준
의자에 다 타버린
연탄이 놓여 있는 줄 알았다.
골목에 쌓인 상자처럼 무뚝뚝하다.
문 닫힌 연탄가게 앞을 지날 때면
주름살에 가린 쑥 들어간 눈
언제나 거리의 사람들을 쫓는 늙은 여인.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린 채 앉아 있다.
늙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사람을 쬔다.
아침의 부신 빛에 다 타버린 연탄
하얗게 허물어져내린다.
박형준의 ‘11월’은 따뜻함 대신 냉기를 품은 도시의 초상을 담고 있습니다. 연탄의 이미지 속에는 사라진 온기와 남겨진 인간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늙은 여인과 타버린 연탄은 서로 닮은 존재로, 생의 허무와 소멸의 정서를 절묘하게 포착합니다.

감상평
이 시는 계절의 낭만보다 ‘삶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1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사라져가는 인간의 온기, 도시의 쓸쓸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 프로필
- 이름: 박형준
- 출생: 1966년 부산
- 대표작: ‘저녁의 고백’, ‘사는 게 뭐라고’
- 특징: 도시적 감수성과 시각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인간의 내면을 탐구

십일월 - 동시영
십일월 /동시영
단풍은 계절의 지문
변하고 변하여
변하지 않는 계절눈물로도 다 울 수 없는 슬픔이 있다고
십일월엔 잎이 새가 된다고
나뭇잎은 본래 나무가 아니었다고꿈에서 깨어나듯
나무가 잎을 떨구고 있다
짧지만 인상적인 시입니다. ‘단풍은 계절의 지문’이라는 첫 구절은 시적 비유의 정수로, 자연이 남기는 흔적을 인간의 생애와 겹쳐 보게 합니다. 떨어지는 잎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움의 시작’으로 재해석됩니다.

감상평
‘잎이 새가 된다’는 상징은 죽음과 재생을 아우릅니다. 변화 속에서도 본질은 남는다는 철학적 사유가 짧은 시 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11월 - 김은숙
11월 /김은숙
서리 내린 지상에는
숙연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찬 공기 한 호흡도
조심스레 들이 마시면
저 멀리 둘러서있는 큰 산 웃으며
산자락을 끌어올리네숨결 저 너머에 가만히 귀를 대는
묵상의 시간
이 시는 11월의 고요함을 ‘묵상’으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차가움 속에서 인간은 더욱 겸허해지고, 산과 공기, 호흡조차 경건하게 느껴집니다.

감상평
김은숙의 시는 단정하고 절제된 언어로 계절의 정적을 포착합니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겸손함, ‘숙연한 고요’가 이 시의 핵심입니다.

십일월 - 박세현
십일월 /박세현
십일월은 시월이 벗다가 남긴 허물이다
왜 아니겠어,
지다 말다 우두커니 서 있는
은행나무, 그 옆에
바람이 아랫배를 대고 간 초등학교 운동장
공터가 훤해서 혼자 웃었다
지나가던 개가 하늘을 쳐다보다
한 발을 접질리며 제게도 없는
웬 불성(佛性)을 몇 점 흘리기에
얼른 주워 마음에 비벼넣는다
바람 따라 올라갔던 은행잎 몇이
수근거리며 허공을 내려오는 길에
십일월의 모서리를 타고 흐른들
저런들 어떠하리는 아니겠고,
지나간 시월과 십일월이 살 맞대고
웃음과 눈물이 우연히 짝짓는 틈새
늦가을 한때가 수수하게 정리된다
박세현의 ‘십일월’은 전환의 계절을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시월이 벗다가 남긴 허물’이라는 표현은 11월의 본질을 간결하게 드러냅니다. 계절의 잔향이 남은 이 시기는 마치 시간의 틈새처럼, 모든 감정이 잠시 머무는 공간입니다.

감상평
박세현의 시는 자연의 변화를 인간의 감정 변화와 겹쳐 보며, 계절이 곧 마음의 비유임을 보여줍니다. 늦가을의 정리된 슬픔 속에서 삶의 순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십일월을 만지다 - 이면우
십일월을 만지다 /이면우
남쪽으로 갈 때, 버스의 오른쪽에 앉고 싶습니다
내내 햇빛 미치는 곳에서 당신을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가지에서 가지로 쉼없이 건너다니는 수마트라섬 긴팔원숭이의 기쁨도 따라올 겁니다
십일월에 남쪽으로 갈 때는 버스의 오른쪽에 앉아, 뻘을 서로 발라주며 깔깔대다 웅덩이로 풍덩 뛰어들어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충분(充分)을 넌지시 웃게 될 겁니다
햇빛 속 맑은 물렁뼈 같은 냉기를 따라가며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즐기는 일에 취해 끝없이 자맥질하는 먼바다 아기고래의 몸짓을 떠올릴 겁니다
솟구치거나 가라않거나 여전히 바다며 고래이듯 한 삶이 그토록 오래 그리워한 건 바로 삶 자체라는 것, 스르르 펼쳐진 손바닥 어디께쯤 슬몃 와닿는 그것, 그게 실은 막 물을 가장 높이 뿜어올린 고래를 만진 일임을 알게 해준 십일월의 날들을 동그랗게 오므려 간직할 수 있도록, 한번 더 남쪽으로 가도록 허락된다면, 당신을 처음 만진 기쁨을 맨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버스의 오른쪽에 앉고 싶습니다
이면우의 ‘십일월을 만지다’는 여행, 기억, 사랑의 감각이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11월이라는 계절을 ‘햇빛이 드는 자리’로 표현하며, 쓸쓸함 속에서도 따뜻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감상평
이 시는 물리적 계절을 넘어, 인생의 여정을 은유적으로 담습니다. ‘삶이 그리워한 건 삶 자체’라는 구절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깨달음을 압축한 철학적 결론입니다.
시인 프로필
- 이름: 이면우
- 출생: 1964년 충북 진천
- 대표작: ‘낮의 별’, ‘청춘의 문장들’
- 특징: 감각적 이미지와 철학적 사유가 결합된 시 세계


결론
11월은 단순히 가을의 끝이 아니라 ‘비움의 시작’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며, 하늘이 높아지는 이 시기에는 모든 생명이 자신을 정리하고 다음을 준비합니다. 시인들은 이 계절의 쓸쓸함 속에서 사랑, 죽음, 회한, 감사, 성찰을 노래했습니다.


이해인의 기도, 나태주의 사랑, 박형준의 현실, 이면우의 철학이 모여 ‘11월’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완성합니다. 독자에게 이 시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조용한 등불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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