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 모음 - 이채, 용혜원, 정호승, 나태주 시인
가을은 유독 시가 잘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들판의 황금빛이 스러져가는 시간, 서늘한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쓸쓸함은 인간의 마음속 감정을 섬세하게 일깨웁니다. 이 시기에는 사랑, 그리움, 외로움, 회한 같은 감정이 짙어져 많은 이들이 시 한 편으로 위로를 받곤 합니다.

이번 가을 시 모음에서는 이채, 용혜원, 정호승, 나태주 네 시인의 대표적인 가을 시를 소개하고, 각각의 시가 지닌 감정의 결과 해석을 덧붙였습니다. 그들의 가을 시 모음을 통해 가을의 정서를 더 깊이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채 - 중년의 가슴에 쓸쓸함이 찾아오면
중년의 가슴에 쓸쓸함이 찾아오면 - 이채
가끔 지나온 뒷모습을 바라보면
저녁에 만나는 바람은 영 쓸쓸하고
해지는 언덕의 새는
늘 어디론가 떠나는데
다시 찾아온 노을 한 자락 물들이는
어제, 그 수많은 어제들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저 산을 넘는데도
이제는 울지 않겠노라고
정말로 그럴 수 없음이라
공연히 핀 꽃이 저녁 하늘만 물들이네이젠 바람도 낮게 불리라
그러면 좀 더 가벼워지리라
꽃들에게도 가끔은 할 말이 없어지고
새들에게도 말을 건네지 못할 때면
가랑잎 하나에도 무엇이 내려앉아
밤 깊도록 낙엽만 숭숭한 가슴이네꽃도 지고 나면, 피는 일 또한
그리움이더라
외로움이더라
그렇게 아픈 것이더라
중년에 쓸쓸함이 찾아오면
사는 것 또한 허무하기 짝이 없더라.
이채의 시는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쓸쓸함과 회한을 고요하게 표현합니다. 시인은 ‘중년’이라는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럴 수 없음을 동시에 담담히 고백합니다. ‘노을’, ‘낙엽’, ‘가랑잎’ 같은 이미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가는 존재의 슬픔을 상징합니다. 특히 “꽃도 지고 나면 피는 일 또한 그리움이더라”라는 구절은 인생의 순환 속에서 느끼는 철학적 사유를 드러냅니다.
감상평
이 시는 단순히 중년의 외로움을 넘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쓸쓸함’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합니다. 쓸쓸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채 시의 핵심 정조이며, 노을처럼 따뜻하면서도 애잔한 정서가 묻어납니다.
이채 시인 프로필



- 이름: 이채
- 출생: 대한민국
- 주요 주제: 인생, 중년, 사랑, 자연
- 작품 경향: 서정적이고 성찰적인 언어로 일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

나태주 - 사는 법
사는 법 -나태주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그리고 남은 날은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나태주의 시는 짧지만, 감정의 밀도가 매우 높습니다. ‘그리움, 쓸쓸함, 사랑’이라는 세 가지 감정이 일상의 행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습니다. 그리운 날에는 그림을 그리고, 쓸쓸한 날에는 음악을 듣는 행위는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자, 삶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너를 생각해야만 했다’는 문장은 시 전체의 감정을 응축하며, 결국 인간의 존재 이유는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감상평
이 시는 나태주 특유의 간결한 언어와 따뜻한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복잡한 설명 없이도 짧은 문장 안에 삶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쓸쓸함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킵니다. 그리움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의 시선은 독자에게 잔잔한 위로를 전합니다.
나태주 시인 프로필


- 이름: 나태주
- 출생: 1945년 충남 서천
- 학력: 공주사범학교 졸업
- 주요 작품: 풀꽃, 행복, 산문집 ‘사랑만이 남는다’ 등
- 특징: 짧은 언어로 깊은 울림을 주는 ‘미니멀리즘 시인’으로 불림

용혜원 - 쓸쓸함
쓸쓸함 - 용혜원
누가
자정이 지난 시간에
어둠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 보다
더 쓸쓸할 수 있을까
용혜원의 시는 쓸쓸함의 본질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가로등은 세상을 비추지만, 동시에 자신은 외로움 속에 서 있습니다. ‘자정’이라는 시점은 고요와 정적의 시간이며, 인간의 내면이 가장 고독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그런 정적 속의 외로움을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며, 인간의 존재론적 외로움을 드러냅니다.
감상평
짧은 시이지만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가로등’이라는 일상적 사물이 상징적으로 변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힘이 느껴집니다. 용혜원의 시는 철학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온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용혜원 시인 프로필


- 이름: 용혜원
- 출생: 1952년 서울
- 주요 작품: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너는 너대로 아름답다
- 시세계: 사랑, 인간관계, 외로움을 주제로 한 감성 시로 대중적 인지도 높음

정호승 - 그 쓸쓸함에 대하여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정호승
당신은 사랑은 기억하지 못해도
분노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도는 기억하지 못해도
증오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오늘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비 갠 뒤에는 맑은 하늘이 더욱 쓸쓸하다
당신의 고백소는 어디에 있는지
나의 고백소는 당신 안에 있는데
간밤에 쥐가 내 심장을 다 갉아먹어
나는 당신에게 가는 길을 가지 못한다그동안 나는 길을 걸을 때마다
구두를 두 켤레씩 신고 길을 걸었다
길을 가다가 밥을 먹을 때마다
하루에 열끼니를 먹고도 배가 고팠다
꽃이 필 때마다 꽃이 돈인 줄 알고
민들레를 뿌리채 뽑아 들었다오늘도 당신의 고백소를 끝내 찾지 못하고
영원히 날이 저문다
이제는 이별의 순간에게 순종해야 할 시간
땅이 없어도 피는 꽃과
하늘이 없어도 빛나는 별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쓸쓸히 사라져야 할 시간
정호승의 시는 쓸쓸함을 사랑의 부재와 인간의 내면적 고통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는 사랑보다 분노를, 기도보다 증오를 더 오래 기억하는 인간의 모순된 본성을 고백하며,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존재의 고독을 그립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 허기와 무력감은 현실의 고통을 상징하며, 끝내 이별과 사라짐으로 귀결되는 시의 흐름은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합니다.
감상평
정호승은 쓸쓸함을 감상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며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습니다. ‘이별의 순간에게 순종해야 할 시간’이라는 구절은 체념 속의 평화, 쓸쓸함 속의 수용을 보여줍니다.
정호승 시인 프로필



- 이름: 정호승
- 출생: 1950년 대구
- 학력: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주요 작품: 슬픔이 기쁨에게, 수선화에게, 저만치 혼자서 등
- 특징: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 내면의 구원을 주제로 한 서정시

도종환 - 쓸쓸한 세상
쓸쓸한 세상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서 새들이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도종환의 시는 쓸쓸함을 개인적 감정이 아닌 세상 전체의 정조로 확장시킵니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정서를 연결하며, 세상 자체가 쓸쓸하기 때문에 꽃이 피고 새가 난다고 표현합니다. ‘쓸쓸함’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존재의 근원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사랑하고 글을 씁니다.
감상평
이 시는 쓸쓸함을 ‘삶의 조건’으로 인식하는 철학적 시선이 돋보입니다. 쓸쓸함이 있기에 예술이 피어나고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도종환의 언어는 담담하지만, 그 여운은 매우 깊습니다.
도종환 시인 프로필


- 이름: 도종환
- 출생: 1954년 충북 청주
- 주요 작품: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 담쟁이 등
- 특징: 현실의 고통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노래함

고정희 - 쓸쓸한 날의 연가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고정희의 시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편지 쓰기’라는 행위로 형상화합니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고독을 흉곽 속의 지도에 비유하며, 그 위에 사랑의 흔적을 적습니다. 시 속 화자는 봄·여름·가을·겨울 내내 편지를 부치지만, 그 편지는 실은 ‘답장 없는 외침’이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입니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라는 구절은 자연의 소리를 감정의 매개체로 삼아, 쓸쓸함을 세상과 공유하려는 시적 시도를 보여줍니다.
감상평
이 시는 내면의 외로움을 예술적 행위로 치환한 작품입니다. 고정희는 쓸쓸함을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글쓰기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의미 있는 고독’으로 전환합니다. 그의 시적 언어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비극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적 온기를 잃지 않습니다.
고정희 시인 프로필



- 이름: 고정희
- 출생: 1948년 전남 장흥
- 사망: 1991년
- 주요 작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상한 영혼을 위하여
- 시세계: 여성과 사회의 고통, 그리고 인간의 외로움을 시적으로 승화한 작품 세계로 평가받음

이병률 - 이 넉넉한 쓸쓸함
이 넉넉한 쓸쓸함- 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과연 우리는 정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저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이병률의 시는 쓸쓸함을 결핍이 아닌 ‘넉넉함’으로 해석하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와 ‘살아가야 할 세계’를 구분하며, 그 사이의 간극에서 쓸쓸함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을 고통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성장하고 서로를 껴안게 만드는 힘으로 바라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는 구절은 쓸쓸함 속에서도 연대를 잃지 말자는 시인의 다짐처럼 읽힙니다.
감상평
이병률의 시는 현대인의 정서를 대변합니다. 복잡한 세계 속에서 ‘단순함’과 ‘무심함’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인상적입니다. 그는 쓸쓸함을 두려움이 아닌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모색합니다. 시의 언어는 서정적이지만 절제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울림을 느끼게 합니다.
이병률 시인 프로필


- 이름: 이병률
- 출생: 1967년 충북 청원
- 학력: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주요 저서: 바람의 사생활, 눈사람 여관, 끌림, 혼자가 혼자에게
- 특징: 여행과 사랑, 쓸쓸함을 시적으로 결합하여 ‘감성 여행 시인’으로 불림

김갑천 - 그리움 그 쓸쓸함에 대하여
그리움 그 쓸쓸함에 대하여 -김갑천
이제 너를 향한
오랜 비행을 쉬고 싶다허공만을 맴도는
나의 날개짓을 이제는
끝내고 싶다.
김갑천의 시는 그리움과 쓸쓸함의 관계를 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오랜 비행’과 ‘허공만을 맴도는 날개짓’은 쉴 곳을 찾지 못하는 영혼의 방황을 상징합니다. 이 짧은 시 속에는 긴 시간의 고독이 응축되어 있으며, ‘이제는 끝내고 싶다’는 말은 단념이자 해방의 선언입니다. 그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려는 심리적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감상평
이 시는 간결하지만 무게감 있는 언어로 인간 내면의 허무를 표현합니다. ‘비행’이라는 동적 이미지를 통해 고통의 지속성을, ‘끝내고 싶다’라는 정적인 결말을 통해 정화의 순간을 대비시킵니다. 김갑천은 쓸쓸함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그리움의 피로감’으로 읽어내며, 인간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회복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김갑천 시인 프로필
- 이름: 김갑천
- 출생: 대한민국
- 주요 주제: 그리움, 상실, 내면의 평화
- 특징: 짧은 시형 속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시세계로 알려짐


결론
가을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진하게 느끼게 하는 계절입니다. 이채는 중년의 회한으로, 나태주는 일상의 따뜻함으로, 용혜원은 고독의 상징으로, 정호승은 인간의 내면으로, 도종환은 세상의 슬픔으로 쓸쓸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의 시는 각각의 시선으로 같은 감정을 해석하지만, 공통적으로 ‘쓸쓸함 속의 따뜻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을밤에 이 시들을 천천히 읊조리며, 쓸쓸함을 감정이 아닌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오히려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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